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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 : 스피노자의 다중 기쁨 철학과 라이프니츠 시각

by juneane 2024. 3. 7.

1. 타자에 대한 무관심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소통하고 교제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사는 것이 생존에 불리하다는 차원에서도 논의를 전개해 볼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더 본질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중세시대를 넘어 인간이 중심이 된, 특별히 인간의 이성이 주목받게 된 근대사회에서는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공간과 지역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곳은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였는데, 지금도 비슷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무관심한 편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데카르트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의 안식처로 사랑받기도 했습니다.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논문을 통해 그 당시 생활상을 그려냈는데, 대도시에서의 삶은 소도시에 비해 자유롭지만 인구밀도가 높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는 달리 서로 간의 정신적 거리는 멀어서 오히려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자유로운 생활의 대가로 고독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와 비교하면 오늘날 대도시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고 자유로우며 고독합니다. 상하수도, 전기 등과 같은 인프라의 발달로 도시의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알지 못하는 이에게 무관심한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들은 타인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눈을 바라보거나 말을 거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동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하며 각자의 스크린 안에서 생활합니다. 비인격적 만남이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지만 대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생활하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개별적으로 일일이 대응하려 한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사진입니다.

 

2.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

인간은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 이면에는 외로움으로 대변되는 불안감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타자와의 공존을 본능적으로 원하지만 대도시의 삶에서는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타자와 관계를 단절할 수도 없으니, 철학자들은 이 지점에서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의 탄생에서 보듯, 홉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사회 계약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약으로 타자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계약으로 이루어진 연애 속에서는 사랑하는 감정을 발전시켜 나갈 수 없듯, 계약은 서로 자유를 지닌 개별적 주체가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와 같은 어떤 철학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자유를 지닌 개별적 주체가 계약의 형태가 아닌 자발적인 연대를 통해 소통하고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 것입니다.

 

3. 스피노자의 다중 기쁨 철학

스피노자는 스페인의 종교 탄압을 피해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정신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대도시의 고독한 삶을 경험하며,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이성을 지닌 정신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실의 삶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가 수반되어야 하며, 이 둘은 삶으로 하나 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삶에 나타나는 충동과 욕망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삶에 대한 충동이나 욕망을 선이라고 판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스피노자에 따르면 욕망이 먼저이며 의식적인 판단은 그다음입니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좋든 싫든 어떤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때 감정이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슬픔은 줄이고 기쁨은 증가시키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타자와의 유쾌한 연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타자와의 공존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함께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의 주장이 정치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4. 라이프니츠의 시각

반면, 라이프니츠는 인간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고, 소통할 필요도 없다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주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개별적인 주체인 한 인간 속에 그가 앞으로 살면서 겪게 될 모든 것들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진리라고 표현했는데, 인간이 보기에 우연적인 어떤 사건들도 모든 것을 아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필연적인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생길 수 있는 기쁨이나 슬픔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신이 예정해 둔 계획에 따라 실현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들은 그저 신이 만들어 놓은 계획에 따라 작동하는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느끼게 되는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감정도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단적으로 보이는 그의 주장이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소통하는 디지털 사회에서는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