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학 기술의 발전과 변화
2024년 전 세계는 챗GPT로 대변되는 AI와 알고리즘에 큰 기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똑똑해진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삶을 더욱더 편리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필요도 충족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운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차 안에서도 자율주행을 통해 개인적,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며, 개인의 패턴을 분석한 인공지능 덕분에 내게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추천해 주는 서비스도 활성화될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3월 한국의 프로 바둑 기사인 이세돌 9단과 대국을 진행했던 구글 딥마인드사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주목을 받은 지 벌써 8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과학 기술은 그 속도를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전문가들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신체적 제한을 받는 인간의 한계를 넘게 해주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로봇,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을 자동으로 운영하게 해주는 인공지능이 있는 것입니다.
2. 인간 신체의 소외
디지털 네트워크는 시공간적 제약이 없다 보니 인간의 경험을 극단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단순히 영상통화를 통해 해외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는 것을 넘어, 영화 아바타에서 등장한 것처럼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신체적, 물리적 감각까지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기술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이나 인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매일 사용하다 보니 손가락의 모양이나 목의 형태가 바뀌는 정도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입니다. 왜냐하면 디지털 세상에는 인간의 신체가 서 있을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디지털 세상 속 아바타로 대체될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로봇과 같은 기계로 일부 대체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비단 SF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보그와 같은 개조 인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로봇 팔이나 로봇 다리를 통해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3. 통 속의 두뇌 가설 실험
이러한 변화는 신체를 인격의 필수 조건이자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토대라고 여기는 것을 부정하는 인식을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 만은 아닙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도 이원론을 통해 신체와 정신을 구분하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적인 사고, 즉 정신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의 끝에는 인격의 핵심인 개별적 신체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고로 팔다리를 잃어도 여전히 사람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하반신을 모두 잃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 뇌를 잃게 된다면, 그때에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보다는 두뇌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핵심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대표적인 가설 실험으로는 퍼트넘의 '통 속의 두뇌'가 있습니다. 통 속의 두뇌 실험은 어떤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된 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에 옮겨졌다는 가설에 기초합니다. 신경조직은 모두 고성능 컴퓨터에 연결되어서 이 두뇌의 소유자는 자신이 완벽히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게 만든다고 가정한다고 하면, 두뇌의 소유자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신경세포로 이어지는 전기자극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가장 핵심에는 두뇌가 있고, 이 두뇌에 일어나는 전기자극만 있다면 인간의 신체는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저 뇌와 뇌 작용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4. 신분 확인의 역할을 하는 신체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인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어떤 행동의 책임 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개별 주체의 신분 확인이 필수적입니다. 즉,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하며, 이때 나라는 존재는 너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신체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익명으로 활동한다고 하지만, 결국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 소재가 발생하게 되면 그 책임을 디지털 아바타가 아닌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특정한 신체를 지닌 개별자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체의 소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는 사이버 공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회 속 책임의 실체인 신체를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타인의 꿈속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리적인 신체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경우에는 실제 발생한 사건과 머릿속에서 상상한 사건과 구분 지을 수 있는 기준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책임의 문제는 내가 실제로 했던 행위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어야 하며 기억에 의존해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기억이 실제 사건에 대한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거짓 기억이나 환각에 따른 것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격적인 존재는 몸을 초월한 어떤 보편적인 정신이 아닌, 반드시 시공간적으로 지속하는 신체를 가진 개별적인 주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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