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주인공 귀도가 자신의 아들인 조슈아를 나치 수용소에서 지켜내는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귀도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자신의 아들은 두려움 없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게임이라고 아들을 안심시킵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사랑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인생은 정말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귀도 가족의 이야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고 분노가 차오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으로 일가족이 모두 죽음의 위기 앞에 놓여있는 이 상황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운 좋게 귀도의 아들은 살아남았으니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조슈아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전부였던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오래 살다가 특별히 아픈데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 호상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가족 입장에서는 호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아름다움과는 먼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감독은 영화 제목을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며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 아름다움은 말로 쉽게 정의 내리기는 어려운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미적 영역의 구분
칸트는 아름다움의 정의하기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眞), 선(善), 미(美)의 세 영역을 구분했습니다. 칸트 이전 시대에는 진선미가 상호 통용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진실된 것은 선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특히, 공동체가 강조된 사회에서는 진선미 중에서 아름다움의 개념보다는 진리와 선함의 개념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받은 셈입니다. 그런데, 칸트가 진과 선으로부터 미를 구분해 내면서 사람들은 참되거나 선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의 해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칸트가 진이나 선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름다움이 진과 선과는 독립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중년의 남성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고 하면, 이 장면은 진선미의 관점에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자동차의 속도가 생명을 잃을 만큼 충격적이었는지를 이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 즉 진리의 영역이 있습니다. 또한, 교통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접근도 가능합니다. 만약 교통법규를 위반한 상대 차량에 의한 사고였다면 사고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물어야 하는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선의 영역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적 영역이 있습니다. 참혹한 교통사고의 장면이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면 그것을 느낀 사람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적 영역으로 이 사건을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무관심의 아름다움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본격적으로 아름다움의 세계를 설명하였는데, 아름다움은 무관심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무관심하게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넋을 놓고 멍청한 상태로 대상을 바라본다는 의미는 아니며, 대상을 자신의 욕구와 관계없이 바라본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는, 배고픈 사람은 눈앞에 놓인 음식을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미적 영역에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무관심하게 대상을 보았을 때 만족감이 생긴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반대로 불만족스럽다면 그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체의 욕구를 떠난 상태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물을 그렇게 바라보도록 교육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칸트의 미적 판단은 "미적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 있는 특권계층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라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4. 대중의 아름다움
이러한 비판에 중심에 있는 철학자가 바로 부르디외입니다. 그는 '구별 짓기'라는 글을 통해 판단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하며 특권계층의 미학이 아닌 대중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부르디외는 칸트가 주장한 무관심의 미학은 보편적이거나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장면을 보며 안타까움이나 애처로움 혹은 범법자에 대한 분노와 같은 윤리적인 판단을 함께 내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무관심의 미학은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갖게 하므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적 판단을 위해 교통사고 장면을 무관심하게 바라본다면 현실의 사고 앞에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문제를 외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칸트가 이야기한 순수미학은 그저 현실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특권계층이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이라는 의미입니다.
5. 숭고한 아름다움
물론, 칸트는 교육과 같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무관심하게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숭고의 느낌입니다.
히말라야 산맥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이나 깊은 대서양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인간은 숭고하다는 감정을 느낍니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긴 것으로, 장엄한 광경 앞에서는 그 어떤 다른 생각이나 욕망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연의 위대함 앞에 압도당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관심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생겨나는 감정이 숭고함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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