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과 망각
인간은 기억 능력 덕분에 일상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도, 하루에 세끼를 챙겨 먹는 것도, 정해진 시간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것도 모두 단순한 일인 것 같지만, 만약 우리에게 기억 능력이 없다면 이 중 어느 하나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을 상실하는 치매와 같은 질병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신체적 능력이 퇴화된 것은 노화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해 볼 수 있지만, 기억 능력의 상실은 그런 자기 위로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답게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 능력은 추앙받아야 마땅하며, 기억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망각은 인간에게는 불필요한 저주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철학자들은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이데아 이론으로 유명한 플라톤은 인간이 개체의 본질인 이데아를 기억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이데거도 역시 진리라는 단어가 망각을 거슬러가는 운동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진리란 기억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양철학에서는 기억과는 반대되는 개념을 중시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비어있는 상태의 공(空)이, 중국에서는 잊는다는 의미의 망(忘)이 강조되었습니다. 장자라는 중국의 철학자는 대종사라는 글을 통해 망각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했으며, 공자의 제자인 안회는 자기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반된 주장을 통해 우리는 기억은 좋은 것이고 망각은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기보다는 기억과 망각이 인간에게 각각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기억으로 구성된 세계
기억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철학자는 바로 피히테입니다. 그는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모든 학문의 기초에는 자기의식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전체지식론의 기초라는 글에서 자기 자신을 둘러싼 것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삶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생각하지 않으면 본질도, 진리도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유는 오직 자기의 의식 속에서만 가능하며, 인간의 삶은 이러한 자기의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과업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기의식이란 바로 인간의 기억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의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히테는 기억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자기의식을 동일성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자는 의자다'라는 주장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개별적 주체인 '나'입니다. 어떤 의자가 동일한 의자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나도 동일한 나여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선물로 만들어주신 의자를 보면서 "이 의자가 바로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의자야."라고 주장하려면, 주장하려는 주체인 '나'는 그 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선물로 만들어주신 의자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동일한 의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 망각으로 새로워진 세계
반면, 인간의 기억 능력을 비판하며 오히려 인간에게는 망각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서양의 철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니체입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글을 통해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희망도, 현재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망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소화불량에 걸린 환자와도 같다는 그의 비유를 살펴보면, 니체가 망각을 통해 무엇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음식을 먹기 위해서 위와 장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데 소화불량에 걸려서 위와 장을 비울 수 없다면 우리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될 것입니다. 니체는 정신 상태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들만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으로만 가득 찬 인간은 오늘을 살고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망각이 없으면 현재도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또한,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하며 사는 인간은 새롭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역동적인 변화를 두려워하며 소심하게 살 수밖에 없으므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변화로부터 기인한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니체가 인간의 기억 능력이 필요 없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도 인간에게는 기억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며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들과 결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4. 기억과 망각 모두에게 필요한 용기
인간은 익숙한 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아마도 기억을 중시하고 망각을 두려워하는 경향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기억해내야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용기 있게 마주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은 새로운 것을 즐거워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반복을 꽤나 지루해하며 새로운 경험을 위해 종종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물고 싶어도 용기 내어 변화를 추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과 망각 중에 무엇이 인간에게 더 중요한지를 논하는 것보다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갖고 과거 또는 미래를 직면하고자 하는 자세가 오늘을 인갑답게 살아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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